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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없어도 만나고야 말고 싶었다. 쏜살같이 문을 열어젖히려다가 말고 제 생각이 너무 헛되고 어림없음을 깨닫자 춤추는 촛불 아래에서 호젓하게 혼자 웃었다. 제 갈 길을 미리 보아나 두려는 것처럼. 주만은 귀를 기울였다. 갈 데 없는 인기척 소리다. 주만은 이불을 뒤집어쓰고도 누가 곁에서 보기나 하는 것처럼 얼굴을 붉히었다. 한 걸음 바싹 더 다가들며 똑똑히 제 아내의 얼굴을 살피매, 그는 물론 제 아내가 아니었다. 그러고도 미협한 듯이 이불 속에서 또다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었다. 주만은 마침내 또다시 몸을 일으켰다. 주만은 제 혼자말로 중얼거린다. 아내는 완연히 제 앞에 와 서는 듯하다. 하늘만 쳐다보던 환상에 싸인 눈을 앞으로 돌릴 제 과연 제 아내는 제 앞에 어엿이 서 있다! 하고 자던 이는 그 토끼 같은 눈을 더욱 동그랗게 뜬다. 그제야 자는 이는 주인이 깨우는 줄 알고 질겁을 하며 일어난 것이나 아직도 잠은 덜 깨어서 연상 조여붙는 눈을 비빈다. 털이는 또 한참 주먹으로 눈을 비비고 닦고 나더니 발그스름하게 잠발이 선 눈으로 어색하게 웃어 보인다. 서리 같은 칼날을 뽑아 들고 공릉버선 위에 눌러 신은 목화로 터벅터벅 땅을 구르며, 그 영채 도는 눈을 제법 무섭게 부릅떠서 악 소리를 치고 달려들면 털이는 혼뗌을 하고 사초부인은 허리를 분질렀다.
털이는 기어코 제가 잠을 얼른 못 깬 변명을 하고야 만다. 여럿이 우 나올 때에는 부끄러워서 같이 따라 못 나오고 뒤미처 쫓아나온 것이리라. 주만은 아까부터 가쁜 듯이 털이를 깨우고 있었다. 벽장에서 부리나케 초 몇 자루를 내어 털이를 준다. 저와 그가 정면으로 마주칠 때 흑 하고 그가 제 앞으로 몇 걸음 다가들던 광경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일순간 꿈이 현실로 나타날 때 그는 흑 하고 놀란 것이다. 그는 이불자락을 제치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초도 벌써 다 닳아 옥촉대 밑바닥에 촉농이 켜켜이 앉았다. 털이도 옷을 다 입고 뒤를 쫓아나가다가 주춤 섰다. 벽오동의 너푼너푼한 잎사귀에 다 기울어진 조각달이 뉘엿뉘엿이 걸렸다. 털이는 그제야 확실히 잠이 깨며 저도 놀란 듯이 서둔다. 털이는 앙바툼한 다리를 큰대자 모양으로 퍼더버리고 입 가장자리에 침을 깨 흘리며 곤하게 잔다. 하고 털이는 별안간 나는 듯이 일어나 앉는다. 털이가 발딱 일어나 부산하게 속옷의 구김살을 펴고 치마를 떼어 입고 버선을 신는다. 수놓은 통손바지에 남빛 반비를 떨쳐 입고 세포 복두를 제켜 쓰고 백옥 허리띠에 구슬끈을 주렁주렁 늘어뜨리고 손잡이에 금을 올린 환도를 느슨하게 차고 나서면 동뜨게 아름다운 귀공자였다. 주만은 남빛 반비를 입고 수놓은 비단바지를 입고 갈 데 없는 귀공자로 차리지 않았는가. 주만은 돌아누운 털이의 어깨를 이리로 잡아 제치며 짜증을 낸다.
주만은 털이의 팔뚝을 잡아 뒤흔들며 귀에다 대고 소리를 딱새같이 질렀다. 털이가 안 된다는 까닭을 미주알고주알 캐내서 수다 늘어놓는데 주만은 참다 못하여 소리를 빽 질렀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배팅의 원칙 중 첫 번째는 감정이 격해진 상태에서의 결정은 절대 선택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토토사다리 중이 고기맛을 알면 법당에 파리가 안 남는다. 주만은 울 듯이 재촉을 한다. 주만은 전에 없이 황황해한다. 주만은 남복을 입은 채로 그대로 쓰러져 털이의 꼴도 보기 싫다는 듯이 돌아누워 버렸다. 주만의 어머니 사초(史肖)부인은 외동자식이 딸 된 것이 원통하여 이따금 주만을 남복을 시켰다. 장난꾸러기 주만이도 남복을 좋아하고 화랑의 흉내도 곧잘 내었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라는 듯이 나타난 것은 푸딩 왕국군. 알아차린 것은 아니겠지 하고 걱정하고있는데… 첫여름 밤은 고요하다. 창 밖은 실바람도 불지 않는지 잎사귀 하나 간댕하지도 않는 듯. 찌잉 하고 귓속만 우는데 문득 사푼 하는 무슨 소리가 나는 것 같다. 그 발자국은 가만가만히 걷는 듯 마는 듯 제 방 가까이 와서 사라진 것 같다. 대단히와 바뀐 것 그렇지. 깬 이는 무안한 듯이 또 한번 웃는다.